고 조남철 9단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 글쓴이 관리자 날짜 2006.07.03 조회 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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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전문기사… ‘마지막 돌’ 놓다
기원 설립해 현대바둑 보급 리어카에 바둑판 싣고 피난
조훈현·조치훈 日유학 주선도
1923년 전북 부안군 줄포에서 출생한 고인은 14세 되던 1937년 도일,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九단의 문하생으로 입문했고 1941년 한국인으론 최초로 전문기사가 됐다. 해방 전 해 귀국한 그는 45년 11월 서울 남산동에 한성기원을 설립, 현대 바둑의 씨앗을 뿌렸다. 한국기원이 지난 해 현대바둑 도입 60주년 기념행사를 치른 것도 이를 우리 현대바둑의 효시로 기산(起算)한 것이다. 당시 고인은 바둑의 국제화에 대비해 순장(巡將)바둑을 현대바둑으로 대체하고, 내기를 절대 금하고 건전한 국민오락으로 보급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공식 기원을 하루 빨리 창립한다는 세 가지를 원칙으로 출발했다.
한성기원이 조선기원, 대한기원을 거쳐 69년 오늘날의 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고인은 언제나 핵심 역할을 떠맡았다. 사무실이 무려 16회나 이전을 거듭하는 동안 피란지에서 명맥 유지를 위해 바둑판을 리어카에 실어 나르고, 버려진 채 불에 그을린 바둑 돌을 모아 닦던 일화는 유명하다. 1950년 최초의 단위 결정시합을 통해 단위제도를 확립한 그는 55년 최초의 국제대회인 제1회 한·중(대만) 교류전을 성사시켰다. 이를 위해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찾아 시범대국을 갖는 등, 기도보국(棋道報國)을 향한 고인의 노력은 끝이 없었다.
56년엔 국내 첫 본격 타이틀전인 국수1위전의 산파 역을 맡았으며 그 스스로 국수(國手)위를 9기에 걸쳐 연패(連覇)했다. 이 밖에도 최고위 7연패, 초대 명인 등 생애 통산 30개 대회서 우승하며 김인(金寅) 등장 이전까지 무적 시대를 구가했다. 83년엔 九단에 올랐다.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조치훈 등 젊은 기재(棋才)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해 거목으로 키워낸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으로 꼽힌다. 또 ‘위기개론(?棋槪論)’, ‘행마의 급소’ 등 순수 우리말 저서를 통해 바둑용어를 확립하며 바둑 인구를 폭발적으로 증대시켜갔다. 정부는 89년 그의 평생에 걸친 활동을 은관 문화훈장 서훈으로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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